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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L WIL 2022. 9. 25. 21:35

    https://www.youtube.com/watch?v=J48XKZ18qtU 

    Michael Snow. (1982)

     

    10년 전 쯤, 이 영화를 보고 '서사분석'을 하겠답시고 달려들었던 적이 있었다.

    이 영화가 글자 배열의 리듬만으로 다소의 서스펜스를 만들어내는 것은 사실이니까.

    그 때는 아무도 안할 법한 일이라면 곧 내가 해야 한다고 여기곤 했었다.

     

    하지만, "당시 나의 태도는 참 이상한 도그마에 붙들려 있었을 뿐임을 지금은 안다." 라는 뻔한 투의 회고를 늘어놓는 것은 이상한 것을 넘어서 기만적인 태도이다.

    10년전의 나는 분명 스스로가 그 이상한 무엇에 붙들려 있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게 뭐냐고? this... this...이 영화가 주구장창 문자열 this를 보여줌에도, 그래서 그 this가 무엇인지 통 알 수 없는 것처럼.

     

    하여튼 마이클 스노우의 이 장난기 어린 영화는 어떤 텅 빈 것을 두고 주변을 배회하고 있으며,

    그 텅 빈 곳을 가리키는 인덱스를 만들어내고 있다.

     

    이런 아이디어는 꽤나 보편적이어서 더 부연할 것도 없다.

    누군가는 장자의 비어있는 수레바퀴 축을, 누군가는 대문자 R 혹은 실재를, 누군가는 '완전 아카이브' 같은 것을 비슷한 위치에 놓아두곤 했다.

    이 보편에 어떤 아키 타입이 있다면, 물론 삼위일체의 교리이다.

     

    삼위일체야말로 현세적인 '보이는 집단'으로서의 교회 -그런 의미에서 '정치적인 집단'에 지나지 않는 교회-에 대비해 '보이지 않는 신성'을 보증하는 것이었다. 교회는 '신의 아들' 예수의 목숨이라기보다는 '사도'에 의해 만들어졌고, 게다가 언제나 어떤 순간 어떤 장소에서도 '성령'이 깃들 수 있는 곳이었다. 그것에 의해서만 교회는 다른 정치적 조직과 구별된다. 따라서 .... 3자 사이의 어딘가에서 한 치라도 깨지게 된다면, (1)교회는 아버지인 신과의 연속성을 잃고 이 세상 속 인간 예수를 교조로 하는 오직 세속적인 집단이 되어버리거나, (2) 신도 중 누군가가 함부로 '신'혹은 '신과 예수'에 자기를 동일화하는 것을 허가하게 되거나, (3) 교회에 깃든 영이 성령이라는 보증을 잃게 됨으로써 각 지역을 배회하는 숱한 주술적 정령들과의 구별원리를 구할 수 없게 되어 ... 

    -후지타 쇼조, <이단은 어떻게 정통에 맞서왔는가> (1997)

    후지타 쇼조의 말대로, 당대 공의회는 향후 1000년간 헤게모니를 유지할 "정통"을 성취해냈다.

    여담이지만, 향후 1000년을 걸고 벌어진 지난한 토론에서 유사성의 원리를 동일성의 원리로 바꾼 것은 단 한글자였다고 한다.

     

    후지타 쇼조의 통찰은 기독교 조직신학에서도 확인된다.

    창조자 일신론, 구원자 일신론, 성령 일신론에 대한 조직신학의 우려가 후지타 쇼조의 문제틀과 거의 겹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왜 TIL/WIL에 이런 글을 적고 있는가?

    가장 그럴듯한 이유는 배운 것들을 이미 최대한 쪼개어가며 업로드 하고 있다는 것일 테지만,

    아마 이 곳에서 만큼은 다소의 가치판단을 강하게 드러내고 싶다는 마음이 큰 모양이다.

     

    게다가 위의 이야기는 어떤 보편에 대한 것이다. 

    접근 할 수 없는 중심, 재현되지 않는 무엇, 그 주변부에서 일어나는 운동, 그 운동과 중심과의 관계.

     

    이를테면, 너무나 헛소리 같지만 이렇게 얘기해볼 수도 있다.

    홀로그램 우주론 마냥, 시간의 시작과 끝의 모든 데이터가 담긴 '완전 데이터 베이스'가 있다고 가정해보자.

    MongoDB는 그 완전 데이터 베이스와 어떤 관계에 있는가?

    부분집합인가? 재현관계인가? 전유인가? 제유인가? 유사성인가? 동일성인가? 그것도 아니면 환유는 어떤가?

     

    헛소리가 정도를 지나쳤다면, 이런 문장은 또 어떨까.

    같은 변수로서 다뤄지는 한 유저의 정보의 경우,

    그것에 대한 데이터 베이스의 데이터와 API의 변수명과 클라이언트의 변수명은 어떤 관계에 있는가?

    그것들은 원본 그 자체가 '복사'되는 것인가? (그렇지 않음을 이미 알고 있다.)

     

    객체는 어떤가? 

    프로퍼티의 복사는 말 그대로 객체가 보유한 자산을 복제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주소를 복사하거나 수정할 뿐이다.)

    객체명의 재할당은 같은 데이터를 공유하는가? (그렇지 않다. 새로운 메모리를 할당받을 뿐이다.)

     

    그렇다면 대체 무엇이 불변하고 무엇이 변하는가?

    상수는 불변하는가? (그렇지않다. 불변성은 변수와 상수를 나누는 기준이 아니라고들 한다.)

     

    혹은 데이터 영역은 변하지 않는다고들 한다.

    정말인가?

     

    API는 상대적으로 변하기 쉬워보인다.

    정말인가?

     

    에컨대, 라우터 함수의 경로나 프로퍼티의 주소 정도를 바꿨다고 그게 '가변'한 것인가?

     


    말장난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르니, 아주 오래된 문제틀로 돌아가는 것이 낫겠다.

    투명성과 반영성은 매개, 인터페이스의 구축에 있어 항상 우뚝 쏟아있는 두가지 봉우리이다.

     

    유저가 내용을 투명하게 들여다보도록 UI를 만들 것인가?

    아니면, 내용을 매개하는 API 창틀의 존재를 불러올 것인가?

    혹은 그 사이를 진동할 것인가?

     

    레프마노비치의 <뉴미디어의 언어>와 키틀러의 <축음기, 영화, 타자기>가 출간된지 각각 20년, 40년이 되어가지만,

    여전히 문제의식은 주변부를 배회하고만 있다.

    텅빈 this의 주변부에는 여전히 통합체의 서술과 계열체의 경험 같은 말들이 너저분하다.

     

    "스스로 사라지는 것"이야말로 어떤 매개적 작업물의 특권이라고 한다.

    매개가 사라지고 무엇인가 드러내는 것.

    this 가 소진되고 무엇인가 가리키는 것.

     

    컴퓨터는 본래 사람의 직업명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기계의 등장으로 자연스럽게 어휘 뜻에 변화가 있었다.

    직업명 뿐이겠는가, 이 기계는 인류가 발전시켜온 수많은 매개의 수단들을 탐욕스럽게 포섭해왔다.

    예컨대, 우리는 회화나 영화나 소설을 보지 않는다. 

    컴퓨터를 볼 뿐이다.

     

    그리고 이 기계에게도 같은 질문을 되돌려주어야 한다.

    코딩은 소진되고 나면, 무엇을 드러내는가?

     


    서론도 되지 못하는 말들을 혼란스럽게 쏟아내고 나니 할 일들의 목록을 좀 적어보고 싶다.

    1. <황제의 새마음> 완독.

    2.강의들로부터 쓸만한 모듈들 정리.

    3.HTTP 강의 마저 듣기

    4.코딩테스트 문제 마저 풀기.

    5.불변객체 마저 정리.

    6.오픈 튜토리얼스 정독.

     

    그리고 하고 싶었던 7번.

    시 하나 업로드하기.

     

    樂府詩(악부시), 婦病行(부병행) 

      
    婦病連年累歲 傳呼丈人前一言
    (부병연년누세 전호장인전일언)
      
    當言未及得言 不知淚下一何翩翩 
    (당언미급득언 부지누하일하편편)
      
    屬累君兩三孤子 莫我兒飢且寒 
    (촉루군양삼고자 막아아기차한)
      
    有過慎莫笪笞 行當折搖 思復念之 
    (유과신막단태 행당절요 사부염지)
      
    亂曰
    (난왈)
      
    抱時無衣 襦復無裏 
    (포시무의 유부무리)
      
    閉門塞牖 舍孤兒到市 
    (폐문색유 사고아도시)
      
    道逢親交 泣坐不能起 從乞求與孤買餌 
    (도봉친교 읍좌불능기 종걸구여고매이)
      
    對交啼泣 淚不可止 
    (대교제읍 누불가지)
      
    我欲不傷悲不能已 探懷中錢持授交 
    (아욕불상비불능이 탐회중전지수교)
      
    入門見孤兒 啼索其母抱 徘徊空舍中 
    (입문견고아 제색기모포 배회공사중)
      
    行復爾耳 棄置勿複道 
    (행부이이 기치물부도)
      
     

    병든 아내의 노래
      
    부인이 병든 지 여러 해더니
    남편을 다가오라 불러 한마디 하려 하는데
    말도 꺼내지 못한 채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는구나
    당신께 두세 명 고아들을 맡깁니다
    우리 아이들 배고프고 춥지 않게 해주세요
    허물이 있더라도 신중하여 함부러 때리지 마시고요
    전 곧 죽게 됩니다
    여보, 제 말을 제발 잊지 마세요
      
    후렴
      
    아이 안을 때 보니 외투도 없고
    속도 없는 저고리만 달랑 있구나
    문 닫아 걸고 창문 막고
    아이 떼어 놓고 시장으로 가네
    길에서 친구를 만나
    주저앉아 울며 일어나지도 못한 채
    아이 먹을 것 사려 구걸하는구나
    친구를 마주하여 우노라니
    눈물은 하염없이 흐르네
    "아무리 슬픔을 참으려 해도 그럴 수가 없네."라 말하니
    친구가 품속의 돈을 더듬어 쥐어 주네
    문으로 들어가 아이를 보니
    울며 어미 품을 찾는구나
    빈 집을 이리저리 배회하며 하는 말
    "앞으로도 이렇게 살아가겠지
    아서라, 말해 무엇 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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